제8회 진주같은영화제에 놀러오세요


2016년 12월 8일 경남과학기술대학교 100주년 기념관 아트홀에서 영화평론가 오동진님을 모시고 <영화로 만나는 문학>이라는 주제로 특별한 강연이 열렸습니다. 다양하고 폭넓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아래에 강연 말씀을 정리 했습니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

 오늘 본 책이에요. <크리피> 일본소설인데, 제가 왜 소설을 봤느냐면요, 영화를 보고 나서, 궁금했었어요. 원작을 감독이 어떻게 바꿨을까. 그리고 원작 부분에서 어떤 것을 자기 테마로 가져왔을까. 소설 첫 장면을 보면서 원작을 그대로 살려갈 수가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영화는 장면을 구축해야 되니까요. 소설이 가진 모든 것들을 다 있는 그대로 따라가기가 굉장히 어렵죠. 쉽게 말하면 핀뽑기를 좀 해야합니다. 시나리오를 구축하기 위해서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장면을 재배치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독이 원작을 읽는데 자기의 시선과 자기의 정치적 태도와 문학적 감수성과 영화적 특질 이런 것들이 배합돼서 나와야 합니다. 그런 한국 감독 중에서 유명한 사람이 박찬욱이에요. 저는 박찬욱<아가씨>를 만들 때 궁금했었어요. 원작이 사라워터스가 쓴 핑거스미스라는 소설인데요, 어떻게 저거를 영화로 만들까. 소설의 배경이 1600년대, 런던에서 좀 떨어진 근교거든요. 그래서 제가 감독한테 물어봤어요, 시대 배경은 어떻게  할 거야, 1600년 댄데. 그러니까 감독이 1800년대 후반에서 1920년대쯤으로 옮겨올 생각인데,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공간도 여기가 어디쯤일까, 약간 모호하게 만들 거라고 하라더고요.

 

 문학을 영화로 가져오는 데 있어서, 사실은 문학적 상상력이라는 것은 워낙 방대하여서 그걸 영화적 상상력으로 치환시키는 과정은 생각처럼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원작에 대한 요해, 이해도가 굉장히 깊이 들어가야돼요. 자기 것으로 바꿔줘야 되니까. 박찬욱은 자기 것으로 바꾸는데 굉장히 능수능란한 재능을 갖고있는 한국 작갑니다. 예컨데, 여러분들이 아시는 <올드보이>. 이 <올드보이>의 원작이 일본만화 '올드보이'잖아요. 박찬욱이 롤모델로 추구했던 감독이 히치콕이에요. 알프레드 히치콕도 원작을 항상 영화로 만들었어요, 원작이 없는 영화가 거의 없었어요. 로렌스 올리비에가 나온 <레베카>라는 영화, 기억나세요? 귀족가문의 남자하고 결혼해서 어떤 고성에 살아가는 여자.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집안에 엄청난 비밀이 숨어있었다는 그런 이야긴데. 전율을 느낄 만큼 어두운 이야기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사람의 사람에 대한 사랑' 이 굉장히 가슴 와 닿는, 어쨌든 레베카는 히치콕이 원작 그대로를 만든 작품이긴 해요. 다른 영화 같은 경우는 대부분 포인트만 가져와요. 



 1930년대에서 50년대 활동했던 작가 중에 레이먼드 챈들러란 작가가 있습니다. 챈들러는 단순히 장르 소설의 대가가 아니라 문학적 언어를 구축해내는데 있어서, 매우 뛰어난 작가적 기량을 갖고있는 소설가입니다. 챈들러의 소설을 히치콕이 가져오면 딱 한 포인트만 가져와요. 예컨데 납치, 살인, 치정, 이렇게 한 포인트만 가져와서, 그것을 다시 자기 작품으로 만드는거죠. 박찬욱이 그걸 그대로 흉내 낸 것이 올드보이에요. 올드보이란 만화를 보면, 올드보이라는 영화하고 전혀 달라요. 거기서 딱 가져온 것은 ‘감금’입니다. 감금만 딱 가져온 거죠. 그래서 그걸 자기 식대로 포장해내는데, 작가가 봤을 땐 좀 화나는 일이지만 영화감독 입장에서 봤을 땐 때로는 영화를 만드는 것은 그런 모멘텀을 얻는 것. 그런 모티브를 얻는 것으로써 소설의 가치를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포인트만 가져오는 게 있는 거죠.

 그런데 <아가씨>는 좀 달랐어요. 제가 아가씨를 보면서 깜짝 놀랐던 것은 사라워터스의 핑거스미스를 거의 중반까지 똑같이 가고 3분의 2부터 끝까지는 바꿨어요. 워낙 소설은 방대한 이야길 담고 있고, 영화는 2시간에 모든 걸 끌어모아야 한다는 한계가 있어서 뒷부분을 좀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것들을 쳐내고, 인물을 죽이고, 인물을 합치고, 막 이래야 하니까. 그런 것 치고는, 박찬욱이 했던 영화치고는, 원작을 거의 그대로 따라갔어요. 그래서 제가 박찬욱의 아가씨란 작품을 가지고 평론을 쓸 때, ‘가장 박찬욱답지 않은 영화가 나왔다.’ 고 이야길 했죠. ‘가장 대중적 어법의 영화로 관객들과 일부분 타협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작품이다.’, 이렇게 제가 이야길 했었죠.





 <샤오홍>이라는 작품은요, 흑룡강 출신 여류시인의 문학적 여러 가지 궤적들을 보여주는 영화고요. 문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절대로 문학적 상상력을 따라갈 수가 없어요. 소설은 글을 보시면 한 페이지 안에 시공간을 뛰어넘잖아요. 순식간에 이어지는 상상력의 꼬리라는 게 얼마나 깊고 풍부합니까. 그렇게 문학은 활자로 보여주잖아요. 영화처럼 프레임 안에 갇혀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아무래도 글로써 상상하는 것과는 차별화될 수밖에 없고 기술적으로든 여러 가지 측면에서건 그걸 다 담아낼 수는 없죠.


 감독이 문학적, 인문학적 상상력이 트레이닝이 되어있지 않으면, 영화를 찍을 수가 없어요. 예컨대, <은교>는 다 보셨잖아요. 정지우란 감독이 만들었는데, 자기의 시나리오 구축 능력과 논리성이 굉장히 뛰어난 감독이죠. 정지우 감독이 은교를 만든다 했을 때 제일 궁금했던 장면이 그거예요. 소설에 시인인 이적요가 은교라는 여고생에게 꽂히는 장면이 나와요. 은교가 집에 찾아와서 유리창을 닦는 장면이에요. 입김을 불고, 유리창을 닦을 때, 빡빡 소리 나잖아요, 그때 시인이 여고생한테 꽂혀요. 그 뒷모습이랑 하하거리는 소리 때문에. 그래서 이걸 정지우가 그대로 따라 할까? 그게 제일 궁금했었어요. 나중에 영화가 나왔을 때 그 장면을 찾아서 봤죠. 아예 그 장면을 드러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장면을 넣었더라고요. 나중에 이 이야길 했는데, 자기도 나중에 이 장면을 어떻게 구축할까를 굉장히 많이 고민했다더라고요. 똑같이 한번 해봤대요. 소리, 그런 제스처, 똑같이 해봤더니 맛이 안 나더라는거죠. 소설에서 느꼈던 그런 맛이.

 그래서 그 영화를 한번 보시면요, 카메라 앵글을 굉장히 다르게 썼어요. 소설에서는 소리와 그 아이의 굉장히 순수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영화에서 보면 앵글이 그 아이의 뒤꿈치로 갔어요. 페티쉬즘같은 느낌으로 그 장면을 찍었어요. 아이가 창문을 닦을 때 발을 들게 되잖아요. 하얀 양말을 신은 아이의 발꿈치를 찍고 틸업했어요. 소설에서는 소리로 이적요라는 늙은 작가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면, 영화에서는 시선으로 갔어요. 그 남자의 시점 쇼트로 간 거예요. 그 장면 하나로 이 남자가 마음이 움직였다는 걸 보여준 거죠. 그러니까 문학적 상상력을 영화적 상상력으로 근접시키려고 감독은 노력해요. 그대로 따라가면 전형적으로 실패하는 케이스도 있고, 그대로 따라가야만 성공하는 경우도 있고, 은교의 정지우 감독처럼 다른 방식으로 치환시켜야지만 더 잘 살아나는 경우도 있어요. 물론 그것을 찾아내는 관객들이 있을 때, 조금 더 맛깔스럽게 이야기가 되겠죠. 모든 영화의 원천은 문학이었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밀정>이나 <암살>같은 작품들은 다 자기가 쓰면서 엄청난 공부를 한 거예요. <암살>을 보면 최동훈이란 사람이 벽에 한 서가를 장식할 만큼 엄청난 양의 책을 다 읽고 그 시나리오를 쓴 거예요. 1920-30년대의 일제 독립운동을 다 공부하고 거기서 캐릭터를 뽑아내고 실제 캐릭터를 넣기도 하고 상상한 캐릭터를 더하기도 하고 이렇게 그 2시간짜리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서 한 2년 동안 엄청난 분량의 연구를 한 거죠. 그 당시의 문학작품을 본 거죠. 이야기를 연결할 수 있는 걸 찾기 위해서, 근데 자기가 특별히 많이 본 게, '약산 김원봉'을 많이 봤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영화 속에 조승우가 맡은 역할 비중이 그렇게 크지 않잖아요. 몇 씬 안 들어가는 그 김원봉 때문에 엄청나게 많이 탐독했는데, 그게 매우 중요했던 거죠. 감독들은 엄청 읽고 공부해서 문학을 영화로 끌어온 거죠. 그렇게 해야지만 문학적 대중들을 영화적 대중으로 끌어올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층위를 확장시키는거죠.  


 저는 장르소설을 많이 봐요. 예컨데, 온갖 탐정소설과 온갖 미스테리스릴러 소설과 온갖걸 다봐요. 그중에서 미야베 미유키<화차>, 우리나라에서 변영주 감독이 영화화 했던 작품이죠. 또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 용의자 x의 헌신, 근데 우리는 <용의자 x>로 나오죠, 방은진 감독의. 일본에도 있어요, 용의자 x의 헌신. 근데 일본것보다 방은진 감독이 훨씬 잘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 유명했던 <백야행>. 한국에서는 이런 원작이 없어서 일본에서 찾아서 만들면, 일본에서보다 훨씬 잘 만들어서, 일본작가들이 그걸 알아요. 그래서 한국감독이 찾아와서 영화로 만들고싶다고하면 그다지 까다롭게 굴지 않아요. 





 최근에 나왔던 영화 중에 <트루스>라고 있는데, 감독은 로버트 레드포드고 주연도 했는데, 이것도 원작이 있어요. 저는 아직 원작을 못 봤지만, 원작이 너무 방대해서, 많이 줄였어요. 다큐멘터리 적인 건 다 드러내고, 인물들과 사건 중심으로, 에피소드 중심으로 축약시켰는데, 잘 만들었어요. 러닝타임이 120분 정도인데, 굉장히 흥미진진하게 촘촘하게 만들어냈어요. 감독이 시나리오 작가 출신이고요,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감독들이 영화를 굉장히 잘 만들어요.

 원작이 있는 영화 또 하나의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이 소설도 재밌어요,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이 이걸 영화화한 건데요. 실화를 페이크 다큐멘터리처럼 소설로 썼고 그게 영화화된 겁니다. 아무튼 마이클푼케<레버넌트> 소설도 한 번 읽어보시고, 영화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렇잖아요, 외국 사람들이 <밀정>을 보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다만 영화는 그 역사적 디테일을 뛰어넘는 보편적 주제의식을 주기 때문에 자세히는 몰라도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투쟁이 있었구나, 또 숭고한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세한 디테일은 알기 힘든 거죠. 그래서 장르 영화에서 규칙을 만드는 거죠. 예를 들어 멜로영화의 규칙이 뭐죠, 디퍼런스예요, 차이. 두 사람의 차이를 크게 두고 좁히는 게 할리우드 멜로영화의 규칙이에요. 아무튼 그런 디테일을 알기 힘든 영화들은 원작이 도와주는 거죠.




<질의응답>


관객 - 영화뿐만 아니라 예술작품을 볼 때, 예술작품을 만드는 주체가 있잖아요, 감독이든 작가든. 예술작품을 볼 때 그 사람을 지우고 볼 수는 없잖아요. 물건을 고를 때도 그 브랜드를 보듯이. 그걸 볼 때 작품자체는 좋지만 그것을 만든 주체가 윤리적으로 안 좋을 수도 있고  특히 영화계에 계시고 아는 감독도 많고 하다보니까 그걸 어떻게 보시는지? 


오동진 - 작품을 만드는 사람과 작품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 저는 다큐멘터리를 볼 때 사람들이 뭐라고 이야길 하냐면 다큐멘터리가 너무 중립적이지 않다 객관적이지 않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하거든요. 왜냐면 중립 객관 있을 수 없죠. 사람은 늘 정파적이고 주관적이죠. 그런데 우리 사회가 가르쳐 준 것은 '너 중립적이여야 돼.'를 가르쳐 준게 아니라 '너 공정해야 돼.'를 가르쳐줬겠죠. 무얼 만들든 간에 너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그걸 보고 평가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그게 공정한거잖아요. 치우친 영화를 만들어도 공정하면 돼요. 마이클무어가 얼마나 치우친 다큐멘터리를 만듭니까. 그건 만들어진 다큐죠 그런데 갖고있는 사회적 정치적 메시지가 비교적 공정해요 공정하게 살자라는 메시지를 갖고있기 때문에 그게 세계 관객들에게 갈 수 있는 거거든요. 작품을 만드는 주체도 사실은 늘 그가 갖고 있는 인간적 실존적 편향성이 있겠죠. 그걸 알고 작품을 보는 것과 그걸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작품을 보는 것은 물론 큰 차이가 있는데 사실은 알고 보면 볼수록 그 차이를 좁힐 수 있는 건 있어요. 김기덕 감독이 갖고있는 그 기상천외한 기행들이 많지만, 그 기행들이 그의 영화를 봄에 있어서 예술적 공정한 시각을 저해하느냐, 그렇진 않거든요. 홍상수가 김민희랑 스캔들을 냈지만, 그렇다고 그의 영화를 평가절하하진 않잖아요. 오히려 그 작가만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 한계나 또는 그것을 뛰어넘는 의지의 발현들을 확인하는 것이 그 작품을 보는데 있어서 저는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관객 - 감독도 좋고 작품도 좋으면 그 사람을 아는 게 영화를 이해하는데 엄청난 도움이 되지만 작품자체는 흠잡을데 없이 좋지만 감독이 어떤 부분에서든 좋지 않다면 그 작품을 온전하게 평가하는데 분명히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요?

 

오동진 - 작품을 평가하는데 그 문제가 개입되진 않을 것 같아요. 제가 가끔 듣는 이야기기도 해요. 선배는 선배의 글과 선배가 너무 달라. 그렇죠, 나의 온갖 모습과 나의 글이 같을 순 없겠죠, 등치는 안되죠. 영화라고 하는 것이든 미술이라고 하는 것이든 어쩌면 감독이 그 작품을 만드는 건 자기가 가장 명징할 때 자기의 정신적 에너지가 하나로 모일 때 집중될 때 만드는 것이잖아요. 그 영화를 벗어난 그 사람의 실존은 굉장히 다를 수가 있다는거죠. 그걸 굳이 등치관계로 성립시키지 않더라도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오히려 그 사람이 가장 명징할 때 만든 그 작품으로 평가하는 게 옳을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게 홍상수 아니겠어요, 또 그게 김기덕 아니겠어요. 영화가 주는 예술적 쾌감이라건 굉장히 대단한 겁니다. 그대로 평가를 하고싶어요, 저 같은 사람은.




 

관객 - 영화평론가를 하시면서 후회 한 적이 있으신지?

 

오동진 - 아뇨, 후회한 적 없어요. 왜냐면 저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던 적이 한번도 없어요. 저는 영화가 만들어진 걸 굉장히 잘 보는 사람 축에 속한다고 봐요. 시나리오를 보면 잘 모르겠는데, 영화 나오면 다 보이는거야, 무엇이 무엇이 잘못됐구나. 어렸을 때부터 사실은 리뷰어가 되고 싶었었어요, 그래서 후회는 없어요. 또 하나는 저는 몇가지가 겹쳐져 있어요. 어렸을때 저널리스트가 되고싶었어요. 저널리스트가 되고싶었는데 영화가 너무 좋았어요 이 두 가지를 같이 할 수 없을까 생각했었는데, 저 어릴 때 친구가 박찬욱 감독이거든요. 걔가 영화를 보고 스터디를 하는 걸 제가 봤을거잖아요, 어깨너머로 배운거예요. 걔가 저랑 얘기하는 걸 좋아했던 이유는 제가 다른 시선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거죠. 저는 기자가되고 기자가 된 이후에 영화 기자가 된거죠. 제가 모델로 삼았던 사람이 한국에선 정영일 선생이에요. 정영일 선생이 조선일보 기자였고요. 저도 비슷한거죠. 25년동안 얼마나 영화를 많이 봤겠습니까. 후회할 때는 그런거죠. 정말 보고싶지 않은 영화를 그걸 만든 감독 옆자리에서 볼 때. 그걸 중간에 나가고 싶은데 끝까지 봐야할 때 그리고 다 보고 나서 감독이 뒤돌아보면서 '영화 어땠어요?'라고 물어볼 때. 그때 참 대답하기 어려울 때. 이럴 땐 후회 합니다. 저는 운이 좋았던 거죠. 어렸을 때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잖아요.

 

관객 - 혹시 영화에서 발생되는 다른 문학작품이 있는지, 아니면 왜 그런 게 흔하지 않은지요? 시각영상으로 훅 들어와버리면 그걸 다시 창작하기에 한계가 있는건가요?

 

오동진 - 지금 말씀하신것처럼 영화로 만들어졌다가 소설로 나온게 꽤 많아요. 제가 개인적으로 볼때는 좀 허접해요.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작품들이 그렇게 거꾸로 가는 작품들인데. 이걸 단언해서 말씀 드리는 건. 백가지의 이야길 가지고 열로 축약을 시키는 것이 문학과 영환데요. 문학작품 원류의 근간을 만들어내기가 쉽지가 않아요. 처음부터 다시 쓰면 몰라도. 그걸 토대로 해서 블로우 업해서 만든 작품은 사실 그렇게 문학성이 뛰어난 영화는 아닙니다. 그런데 찾아서 읽게 되는건, 예컨데, 미국에서 가장 시나리오 잘쓰는 사람이 아론 소킨이잖아요 아론 소킨이 뭘 만들었냐면 <뉴스룸>이란 미드를 만든 작가출신의 감독이에요 시나리오를 정말 잘써요 <웨스트 윙>이라는 작품을 썼는데 어떤 미국 정치적 교본보다도 뒤어난 시나리오예요. 영화는 영화에서 끝나는 게 맞고요. 문학은 파장성과 확장성과 확산성이 대단하기 때문에 그걸 가능하면 연극 무대로 영화의 공간으로 또는 뮤지컬로 만드는 것은 더욱 좋죠. 많은 대중들을 만날 수 있으니까. 문학의 한계는 대중성이 약한 거잖아요. 사람들이 다 읽지 못하니까. 그런데 그거 대중적으로 연결시켜주는 고리가 이런 대중문화예술이겠죠. 아론 소킨 같은 사람의 이름은 기억해두시면 작품보실 때 이 작가구나라는 생각을 하실거예요.

 

관객 - 아무래도 직장 생활을 하다보니까, 책이나 영화를 많이 보지는 못하거든요. 서점에 가도 책이 너무 많아가지고, 고를 때 힘들어요, 영화도 그렇고 읽기전에 이 책이나 영화가 좋은 작품이다라고 고르는 기준이 있으십니까?

 

오동진그건 사실은 변곡점을 좀 넘기면 쉽긴 해요. 저 같은 사람은 예를 들어서 주식 같은 건 평생을 안 해본 사람이잖아요. 그쪽을 전혀 모르잖아요. 이것만 평생 하다 보니까 일정 나이가 되니까 변곡점을 넘긴 거죠. 작가가 가지고 있는 삶의 지형도가 보이고, 어떤 작품이구나, 어떤 작가구나, 어떤 얘기 구나가 자연스럽게 캐치가 되는 건데, 변곡점을 넘기지 않으면 그게 쉽지가 않죠. 굳이 책을 다 읽고 영화를 다 볼 순 없죠, 어떻게 그렇게 삽니까. 그래서 저 같은 사람이 필요한 거고요.다만 사람이 가진 지적 욕구와 그 결핍감이라는 것은 아주 대단한 샘물과 같은 것이어서, 그걸 채워줘야 하는 거거든요. 근데 현대사회가 너무 복잡하고 힘드니까 닉 혼비처럼 좀 걸려서 읽으세요 다 안 봐도 괜찮아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못 주입한 교육이 있어요. 책을 끝까지 읽고 책거리 해야 된다. 안 봐도 돼요. 책을 보시다가 30페이지 보시다가 뒤에 훅 넘겨도 돼요. 나랑 좀 안 맞는 책이야 그럼 보다 말고 또 다른 책을 읽는데 보다가 만 책에 거기에 무너가 답이 있을까 또 돌아올 수 있거든요. 저는 이렇게 자유롭고 느슨하게, 편하게 벌려놓고 책을 읽으셨으면 좋겠어요. 영화도 자면 돼요. 사실 대중 예술 중에서 가장 저렴한 매체잖아요, 만원. 그렇잖아요, 오페라, 뮤지컬, 7만 원 8만 원씩 하는데 이건 할인받으면 8,000원 까지 내려갈 수 있잖아요. 들어가서 피곤하면 좀 자죠. 뭐 저는 직업적으로 가지 않는 한은 편안하고 자유롭게 보시는 게 좋습니다. 저는 극장이 없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그런 거예요.


  저는 씨네필처럼 영화를 전투적으로 보는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영화가 세상을 바꾼다고 하는 그 믿음과 신념을 잃어버린 지 오래예요. 영화 한 편이 그걸 다 바꾸지 못합니다. 다만 사람들을 모을 순 있어요. 극장이 없어지지 않는 이유는 그거예요. 맨 앞줄에서 영화를 보는데 예를 들어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보고 막 울고 있는데 자기도 알아요. 뒤에 사람도 울고 있다는 걸 그런 공간이 주는 공감의 보폭이 크고 넓어요. 그 공감 소통 이게 세상을 바꾸는 거죠. 영화 자체가 바꾸는 게 아니라 그 영화 자체로 만들어지는 연대 교감 소통의 연결 이런 것들이 세상을 바꾸는 거죠. 저는 왕가위<일대종사>라는 영화를 보면 제가 제일 좋아하는 대사가 ‘등불을 켜라,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거든요. 영화가 등불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는 등불이 사람들을 극장 안에 모이게 하고 여러 가지 세상에 대한 이야길 같이 나누게 하고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역할을 하는 거죠 강박관념을 갖고 보시면 영화 보기가 지루하고 힘드세요.

 

관객 -  현 시국을 영화로 만든다면 어떤 감독이 만들면 좋을까요?

 

오동진 - 지금 시국과 관련된 영화를 만드는데 가장 잘만들 수 있는 감독은 최동훈이 맞을 것 같아요. 최동훈이 가장 뛰어난 점은 디테일이에요. 이야기의 디테일이 좋아요. 사실은 최동훈이 <도둑들>에서 워낙 장르적인 영화를 만든다고 해서 좀 그랬었는데 <암살>을 보고 제가 '최동훈이 진화하고 있구나, 공부하고 있구나.'라고 다시 느끼게됐죠. 그리고 영화는 사회의 거대한 재앙이나 거대한 이벤트를  먹고 자라요. 그런데 시간이거든요. 알랭레네 감독<히로시마 내 사랑>이라는 영화를 만들기까지 나가사키하고 히로시마에 원격투하 된 이후에 16년 쯤 지나서 나왔어요. 정서적으로 정리하고 정돈할 시간이 필요해요. 그 때의 정치적 역사적 트라우마를 다 극복하고 정말 정자세로 앉아서 뭔가 그 시기를 정리할 수 있는 영화가 나오는 거죠.


 세월호는 영화가 만들어질수가 없어요. 칠레 영화중에 <33>이란 영화가 있어요. 광부 33명 구해내는 얘기예요 매몰되 있던 광부를 정부와 시민단체가 함께 끝내는 구해내거든요. 그건 영화로 가능해요, 해피엔딩이잖아요. 실제 사건이 세월호는 실제 사건이 해피엔딩이 아니잖아요 그럼 그걸 극영화로 만들어서 끝에 해피엔딩으로 만들어요? 그럴 순 없잖아요 그러면 실제 사건처럼 갈 거예요? 그걸 어떻게 다시 보여줘요, 사람들한테. 못만들어요. 다큐멘터리는 만들어요, 도대체 무슨일이 있었는지. 그런데 극영화는 애초부터 만들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15년, 20년 쯤 지나면 만들어질수도 있다고 봐요. 사람들이 정신적 트라우마나 상처가 조금은 극복하는 시기가 지나면 만들어지는거죠. 이처럼 광화문 집회도 시간은 좀 걸리겠죠. 



* 강연에서 언급된 영화 (소설이 원작인 영화 작품) *
 <크리피>, <아가씨>, <레베카>, <올드보이>, <샤오홍>, <은교>, <화차>, <용의자 X>, <백야행>, <트루스>, <레버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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